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잊혀진 전쟁 (문단 편집) === 어정쩡한 결말 === 6.25 전쟁은 완전한 승전도, 완전한 패전도 아닌 [[휴전]]으로 끝났다. 이렇게 '어정쩡하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승패가 명백한 제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다루기가 애매하다. 흔히 2차대전은 미국의 영웅같은 면모가 부각되고,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자성하는 성찰이 부각되어 다루기 쉬우나, 6.25 전쟁은 감동으로도 성찰용로도 다루기 어쩡쩡하다. 이기지 못한 전쟁을 미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전쟁에 미국이 참전한 것은 별로 비판받을 건덕지가 없다. 미국도 상당한 전비를 치러야 했고, 결과적으로 승리라고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휴전이 선언되어 뭐라 자랑할만한 여지도 못 만든 전쟁이 되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표면상 그렇다는 것이다. 6.25 전쟁에서 [[김일성]]이 수립한 [[작계]]는 ''''[[한반도]] [[적화통일]]''''이고, 공산권 입장에서는 한반도를 적화시켜 극동 자본주의 세력의 힘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민의 피와 돈, 병기를 갈아넣어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을 막아내어 대한민국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아직 6.25 전쟁이 [[휴전]] 중이라고는 해도 미국과 대한민국이 이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북한을 제외하면 이 전쟁에서 가장 손해를 본 세력은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진먼 포격전]]만 봐도 알 수 있듯, 중국은 [[대만]]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있었으며, 6.25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 침공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국민당]]을 완전히 무너뜨려야 중국에서의 공산 혁명이 진정 완성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의 장악이 완성되는 것이었다. 대만의 완전한 합병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가장 큰 숙원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 자체를 원치 않아 김일성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부했었다. 러시아에서 공개한 기밀문서에도 그러한 면모가 덧보인다. 아무래도 기밀문서를 공개한 쪽이 소련의 후신을 자처하는 러시아인 만큼 러시아가 정말 민감한 부분을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하는 시각도 여럿 존재하나, [[니키타 흐루쇼프]]가 회고록에서 밝힌 부분을 고려하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1252#home|중앙일보 '소 흐루시초프가 밝힌 「한국전쟁 비화」']] 출처. 예전에는 흐루쇼프를 흐루시초프로 불렀다. '탱크 1개사단만 더 있었더라면 그(김일성)는 저지선([[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으며 전쟁을 끝냈을 것이다.'라는 발언을 덧붙인 것을 볼 때, 흐루쇼프는 6.25 전쟁과 관련한 스탈린의 판단에 못마땅한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이 6.25 전쟁에 회의적이었고, 미국과 마찰을 벌이느니 그냥 북한을 대한민국에 줘 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은 확고해 보인다. 사실 체면이고 뭐고 알 바 아니고, 일단 미국과의 마찰은 피하고 보자는 식의 '스탈린식' 외교, 즉 '''[[일국사회주의]]'''는 당시 소련의 상황과 미소간의 국력 격차를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역당 서기장으로 활동했던 흐루쇼프와 달리 스탈린은 소련의 서기장으로서 미국의 파워를 직접적으로 확인한 인물이었다. [[독소전쟁]] 당시에 보았던 미국의 마술만 해도 [[오버로드 작전]], [[무기대여법]], [[태평양 전쟁]],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폭 투하]]가 있다. 전후 미국은 [[마셜 플랜]]을 벌이며 한없이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전후 서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서방의 역량을 보겠다고 [[베를린 봉쇄]]를 시도했으나,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무제한 공수작전'''으로 응수했다. 독소전쟁으로 자국민 2천만명을 잃고 산업 기반은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 핵무기 격차도 심각한 상황에서 이런 나라와 전쟁 직전까지 가겠다는 것은 그냥 미친짓이고, 최소한 스탈린은 그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언급된 흐루쇼프의 회고록을 보면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북한 문제에서 완전히 발을 빼는 모습을 두고 '스탈린은 겁을 먹고 있었다. 그는 미국을 두려워했다.'라고 평가했고, 흐루쇼프 본인도 미국을 다소 낮잡아 보는 경향이 있어 보였는데, 흐루쇼프는 결국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의 쓴맛을 톡톡히 보게 된다. 여튼, 흐루쇼프가 속으로 낮잡아 보든 어쨌든 당시 스탈린은 동구권의 교황이자 소련 최강의 권력자인 ''''강철의 대원수''''였다. 동구권에서는 스탈린 '동지'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고, 그래서 적화통일에 눈이 먼 김일성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여기서 김일성에게 일종의 지급보증을 서 주면서 스탈린의 허락을 끌어낸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마오쩌둥]]이다. 사실 소련 입장에서는 한반도에 친서방 국가가 들어서도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가 비교적 더 위험해지기는 하겠지만, 이미 소련은 [[베링 해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대치하는 중이었다.[* 폭이 약 80km인 베링 해협은 [[대한 해협]](약 200km)보다 폭이 좁다. 정확히는 [[쓰시마 섬]]이 없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공군]]과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의 전력 격차가 있음에도 '육군에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압도적이니까 [[한국군 vs 자위대|쓰시마랑 규슈는 점령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말이 나오곤 하는데, 미소간 재래식 전력 격차를 감안하면 일도 아닌 문제가 된다.] 거기에 완충지로 중국이 있는 상황이니 하나 쯤 더 친서방 국가가 생긴다 해서 크게 손해를 보진 않는다. 또한 소련의 역량은 [[모스크바]]를 위시한 서부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 위기감이 그리 클 리 없었다.[* 반대로 이것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졌다. 당시 기준으로, 미국은 [[튀르키예]], [[이탈리아]]에 배치된 핵무기를 이용해 즉각적으로 모스크바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었으나, 소련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는 달랐다. 한반도에 친서방 국가가 들어온다는 것은 곧 중국 동북부, 더 나아가 '''[[베이징]]'''이 심대한 군사적 위협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부산광역시]]와 베이징 간 직선거리는 고작 1,200km 내외이며, [[신의주시]]와 베이징 간 직선거리는 고작 700km 내외이다. 신의주를 비롯한 북한 서북부에서 베이징을 타격하려면 [[단거리 탄도 미사일]] 수준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다. 물론 1950년에는 [[미사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했지만, 냉전식 [[전면전]] 기준으로도 700km는 그리 멀다고 할 수 없는 거리이다.[*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군은 약 3개월 보름만에 [[모스크바 전투|모스크바]] 코 앞까지 진격하는 것에 성공했다. 당시 독일과 소련으로 분할된 폴란드 중심 기준으로 약 1,100km이다.] 일단 서방과 각을 진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불침항모 한반도에서 날아오는 [[미합중국 공군]]의 공습''', '''[[황해]]의 [[제7함대]]''', '''천혜의 교두보 한반도에 상륙하여 베이징으로 진격하는 미합중국 육군'''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여튼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일종의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보증수표'를 써 주었고, 실제로도 충실히 이행하여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사령부|UN군]]이 [[1.4 후퇴]]를 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펑더화이]]와 같이 있던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공습으로 전사한 것에서 알 수 있듯, 6.25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이 겪어야 할 대가는 엄청났다. 1950년 10월, 11월에 '''약 27만'''을 투입한 것에만 알 수 있듯, 어마어마한 인원을 동원하였는데, 자연히 상상도 못할 정도의 물자를 소모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상자가 적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비전투손실까지 고려하면 약 90만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 더해 [[주한미군]](당시 [[유엔군사령부]])이 한국 땅에 주저앉았고, 제7함대의 비중도 커지는 등 미국이 중국을 크게 경계하게 만들었다. 중국은 6.25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인해 북한이라는 완충지는 지켰으나 대만을 포기해야만 했다. [[육참골단]]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대만을 점령하지 못하는 바람에 완전한 중공 혁명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발휘할 수 있는 패권도 익히 줄어들었다. 물론 중국공산당에게는 아직까지도 대만 합병이 숙원 중의 숙원인지라 [[하나의 중국]] 원칙을 필두로 하여 호시탐탐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럴수록 중국의 인상만 나빠지는 악순환만 반복되는 상태이다. 결국 미국은 6.25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을 직접적으로 살려냈고, 대만을 간접적으로 살려냈으며, 일본의 회생을 도왔다. 이 세개의 국가는 극동아에서 확실한 미국의 편을 들어주고 있고, 미국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높은 중국을 강하게 견제하고 있다. 또한 3개 국가 모두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거나(일본, 대한민국), 거의 선진국에 도달하였기에(대만)[* 1인당 GDP는 대만이 대한민국보다 약간 높지만 실질적인 임금의 괴리가 크다.] 미국 입장에서 '도와주길 잘 했지? 우리 말 잘 듣고 우리편 되면 이렇게 된다!' 라며 자랑할 만한 거리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